그림으로 보는 지장황보살

그림으로 보는 지장황보살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 강생신라 서상기특(降生新羅 瑞相奇特) - 서기 696년, 신라의 계림주(경주시)에서 왕족 중에 탄생한 김교각. 그의 아버지는 성덕왕이었고 어머니는 성정황후였다. 그는 정수리뻐가 솟은 특이한 용모로 지혜가 뛰어났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2 불연금란 전심납불(不戀金? 專心納佛) - 김교각은 유년시절부터 부귀영화를 싫어하였고 당에 유학하여 여러 학문을 공부했지만 불교만이 비로소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이전 이름을 버리고 큰 수양을 시작했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3 낙발섭해 입당구법(落拔涉海 入唐求法) - 김교각은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재차 중국으로 수양을 떠났다. 서기 719년 24세에 신라에서 흰개를 데리고 머나먼 당나라로 수행길에 올랐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4 방도각산 간난행정(訪道各山 艱難行程) - 김교각은 각 지방의 명산에 들러 중생들에게 불법의 진리를 설법하였다. 안휘성에서 봉황산, 제운산으로 그 후에 또 경향산, 천봉사와 귀주 등에 까지 찾아가면서 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만났다. 지금도 이 지방에는 김교각과 관련된 고사와 전설들이 전해져 온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5 초몽접인 시 ‘수혜미’(初蒙接引 詩 ‘酬惠米’) - 김교각은 고행 끝에 구화산 북쪽에 도착하여 오용지 부자집에서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들 부자는 지성봉 민씨 집에서 수행할 곳을 주선해 주니 그곳이 바로 화성사였다. 김교각은 감격하여 〈수혜미〉를 지어 감사를 표했는데 이 〈수혜미〉는 오씨 종가의 가보로 구화행사 석벽에도 새겨져 있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6 걸모서신 민공시지(乞募栖身 閔空施地) - 김교각은 구화산의 주인 민공에게 가사 한 벌을 얻어 가사자락으로 덮이는 만큼의 땅을 시주할 것을 약속받고 가사를 펴니 가사자락은 구화산을 모두 덮었다. 민공은 고승의 법력에 감탄하고 그의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도명화상이 바로 그였다. 민공 역시 후에 속세를 떠났는데 지장보살의 좌우 입상이 바로 민씨 부자인 것이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7 동애고수 불덕고결(東崖苦修 佛德高結) - 김교각은 땅은 얻었지만 사원이 없었고 주변이 황폐하여 마실 물도, 풍부한 식량도 없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한 동굴에서 수양하니 산신이 감동하여 아름다운 부인으로 화하여 약을 주고 샘을 만들어 바쳤다. ‘용년헌천’이 바로 이곳이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8 남릉초경 잠심공독(南陵抄經 潛心攻讀) - 김교각은 〈무량수경〉,〈관우량수경〉,〈아미타경〉, 〈고음성다라니경〉 등 4부의 불경을 매우 아꼈다. 그러나 초본이 없어 도움을 청하니 이국에서 온 구법대사를 존경하여 손수 베껴 바치니 대사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하여 경읽기에 몰두하였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9 개산수전 궁신교화(開山水田 躬身敎化) - 김교각은 수행할 때에도 손수 제자들과 함께 물도 길고 밭도 개간하였다. 황무지를 개간한 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되었지만 여름에는 흙으로 밥을 짓고 겨울에는 모닥불로 옷을 입으며 궁핍한 가운데서도 교화에 힘써 나갔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0 화성건사 도장휘황(化城建寺 道場輝煌) - 청양현에 제갈절 등의 사람들이 등산을 하다가 김교각의 고행에 감동을 받아 단공의 옛땅에 절을 지을 것을 청하여 본당을 올리고 사원을 세웠다. 지주 태수가 지장의 고상한 성품을 숭앙하여 많은 재물과 ‘화성’이라는 편액을 조정에서 받아왔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1 담경논도 회인불권(談經論道 誨人不倦) - 김교각은 끊임없이 경을 공부하여 그 언행에서 모범을 보이고 열심히 교화하였다. 안좌암, 전라봉 등에서 경을 논하고 살생하지 말것을 권하였다. 신도들은 사방에서 대사의 불법에 감화를 받았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2 감화친인 공건도장(感化親人 共建道場) - 김교각에게 신라의 왕이 되어줄 것을 설득하러 온 조우, 조보 두 외삼촌은 오히려 감화를 받아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승려가 되어 도장을 세웠다. ‘이성전’이라는 암자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그들을 추모하는 이성회가 매년 열린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3 명천정심 낭랑보탑(明泉情深 娘娘寶塔) - 김교각의 어머니는 멀리 신라에서 구화산으로 달려와 울음을 그치지 않아 눈이 상하였다. 김교각은 화성사 앞 우물에서 물을 길러 어머니의 눈을 씻으니 눈이 다시 뜨였다. 이 우물에 보탑을 세우니 후세 사람들이 ‘명안천’이라고 불렀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4 증시동자 권권애심(贈詩童子 拳拳愛心) - 대사는 아이에 대해서도 순박하고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의 수하에 있는 동자가 산사의 적막함을 참을 수 없어 하산하기를 청하니 시를 지어 동자를 배웅하였다. 이 시속에는 동자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애뜻함과 좋은 사람이 되라는 훈계의 내용이 가득 담겨있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5 영장종고 영진명산(靈場終古 永鎭名山) - 794년에 교각대사는 99세의 나이로 모든 승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원적하였다. 원적 때에는 산이 울고 돌이 떨어졌으며 종을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육신을 돌항아리에 넣어 3년 후에 열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여 사람들은 그를 지장의 화신이라 여기고 지장왕보살로 봉하였다. 이 이후로 구화산과 김지장은 중국의 4대 성지로 그 빛을 더하고 있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6 영휘전앙 만사천추(靈輝專仰 万祀千秋) - 김지장이 입적한 후 그 육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썪지 않아 그 육신에 금을 입혀 안장하고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한밤에 둥근 빛이 나고 와석이 찬란하여 ‘신광령’이라고 칭하였다. 후인들이 탑위에 절을 세우니 이 탑전이 지금의 육신보전인 것이다.
구화수적도(九華垂迹圖) - 17 서원굉심 종성정과(誓願宏深 終成正果) - 김교각은 신라왕자의 영화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가 수행하며 수십차례의 고행을 하였다. 그는 이런 수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어 대사가 되어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사상에 큰 명성을 날렸다.